회사를 그만두고 – 잘나가는 증권사의 평범한 팀장에서 백수로

직장생활 12년을 채우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첫직장이 만 4년 근무, 두번째인 이곳은 만 8년 근무

두번째 회사로서, 2000년 1월  처음 입사할때 입사순서에 따라 매겨지는 사번이 73번이었다.  100명도 안되는 회사에서 동분서주하며 증권회사라기보다는 벤처같은 분위기에서 일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직원이 2500명에 주가가 150,000원, 계열사를 포함하면 관리자산이 100조에 육박하는 명실상부한 국내최고의 금융그룹이 되었다.  특히, 자통법 통과후 향후 수년간은 가장 전도 유망한 증권사로 여겨지고 있다.

회사는 점점 좋아지고, 급여도 점점 많아지는데, 해가 갈수록 일하는 재미는 줄어들었다.  “일”만하면 되던 벤처에서 관리, 조율, 정치가 필요한 기업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백수생활 3일째 .

잠자리에 들어가는 시간은 회사 다닐때랑 크게 달라지지 않은 새벽 1시에서 2시사이… 하지만 일어나는 시간은 회사 다닐때는 6시30분 백수되고부터는 8시에서 9시사이.

퇴사선물로  본부 팀장들이 사준 닌텐도 DS Lite 는 백수에게는 아주 유용한 선물인듯 싶다. 서른아홉에 닌텐도를 퇴사선물로 받아나온 날 사람들은 참 “특이한 놈”이라고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욕심때문에 일이다 공부다, 등등.  물론 사진이다, 게임이다 놀기도 했지만.  무리한 체력운영과 부족한 수면등으로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져 이번달 까지는 일단 쉬는 모드로 지내고 담달부터는 다시 속도를 내야할듯.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에는 백수로 Soft Landing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는데, 왜냐면 주변에서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를 보면 너무 힘들게 그만두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게 능력이 많아도 문제가 되고, 능력이 없어도 문제가 되더만.

근데 막상 본부장남, 대표님, 부회장님 모두 인사드리고 나니, 한편으론 시원섭섭하고 또 한편으론 창립때부터 일해온지라 아쉬움도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는 앞으로 내가 스스로 꾸려가야할 자유로운 시간들을 혹시나 헛되게 보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앞선다.

맘이 편해지기 보다는 항상 여유없이 경주마처럼  달리던 사람이 갑자기 느리게 살려니 뭔가 부자연스럽고 불안하다. 학생시절에 느껴보았던 여유로운 느낌을 느낄 수가 없다. 마치 담배를 끊고 금단현상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거의 안피던 담배가 요즘은 많이 늘었다. -,.-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앞으로 먹고 살 꺼리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밀린 블로그 정리도 좀 하고, 읽고 싶었던 책도 좀 읽고, 정리하다만 iTunes에 음악들도 정리좀 하고, 그동안 소홀히 했던 사진찍기도 좀더 본격적으로 해보고, 그리고 일 때문에 아쉬움이 컸던 대학원 공부도 심도있게 마무리하고, 그리고 영어도 비지니스 미팅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리고…..음……가장 중요한 건강도 회복하고.

이것들을 다 하려면 2년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데.~

아직은 느리게 사는게 불편하지만,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들 그리고 정말 하고싶었던 것들을 하기위해 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시간인 만큼 회사를 다닐때보다도 하루를 더욱 귀중하게 쓰지 않을 수 없을것 같다.

회사를 떠나기전 그동안 관계가 있었던 많은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니 대부분이 ‘인생에서 쉼표를 찍을’ 수 있는 나를보고 부럽다고들 한다. 또는 어짜피 회사를 평생다니지는 못할것이고, 지금 팀장급들이면 빠르면 1~2년, 늦어야 5~6년후면 지금의 회사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니 나는 그저 몇년 빠를 뿐이라고, 나나 그들이나 크게 다른것은 없다고도 한다.

대부분은 이런 결정을 내린 나를 그리고 나의 결정을 지지해준 와이프를 대단하고 했지만, 일부 몇분은 ‘넌 잘못 생각한거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줄 알면 큰 오산이야’라는 식의 굿바이 인사말을 해주신분도 계셨다.

뭐 지금으로선 누가 옳고 그런지를 판단할수는 없겠지만, 그분들의 약간은 빈정거림내지는 우려도 나름대로의 세상살이와 현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에 조금 기분은 씁쓸하지만 좋은 충고로 생각해야겠다.  하지만 너무 세상을 직장이 전부인것처럼 틀에 갖혀서 바라보는 것 같아서 갑갑한 느낌도 다소 남는다.

우선은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좀 더 고민해 봐야겠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느리게 걷기’를 실천하며 좀더 원론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답을 찾아봐야 겠다.

정말 원하는게 무엇인지, 정말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다시 조직에 들어가서 정치와 사람관리를 하기보다는 가능하면  할아버지가 되어서 까지도 스스로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고, 동시에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그런일을 찾고 싶다.

좋아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재미도 있고, 생활도 가능한 그런일이 정말 가능한건지 아닌건지 지금부터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PD가 되는 리얼리티 쇼를 진행한다고 생각하면 한편으로 흥미진진하다.

댓글 2개

    1. 댓글이왜 이렇게 오래 묻혀있었는지 저도 잘 모르겠네요. 지금이라도 보신다면 답변이 없었던 점 죄송합니다. 지나고 보니 10년이 정말 한순간이네요. 지금은 호주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할때와 비교해보면 수입은 많이 줄었지만 개인시간이 많이 늘었고 좀더 여유있게 남들과 덜 비교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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