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 이인화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ゝ과 함께 92년에 건진 수작(순전히 내 관점에서)이다. 다중 1인칭 시점이라는 서술방식으로 참신하게 우리에게 다가왔으며, 이념의 종말을 고하고 80년대를 지난 시대로 바라보는 또 한 관점에서의 대전환기를 시작하는 소설류의 하나로도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영향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판도 많았고, 표절시비도 대단했지만 신인소설로서 대단한 입지를 세울만한 작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이후 영원한 제국에서는 조금 소설이 대중성을 겨냥한 느낌이 있어서 인지 오히려 대중적인 인기와는 달리 이 첫 장편이 더욱 잘 된것 같고 또 좋은 느낌이다.

잘 알고 있겠지만 이인화는 필명이고 그는 류철균이란 이름의 평론가이다. 계간지 ゛상상ゝ같은 곳에서 그의 평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류철균으로서 이인화를 평론했다는 것은 좀 우습게 느껴진다.

1.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위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ゝ(1967)

2.

그렇다. 바다는

모든 여자의 子宮 속에서 회전한다.

밤새도록 맨발로 달려가는

그 소리의 무서움을 들었느냐.

– 강은교, ゛自轉2ゝ(1969)

3.

나는 離脫한다.

목이 부러진 채

어디론가 달리어 가는

이 밤의 둘레에

불타는 時間의 아지랑이

– 이승훈, ゛허상ゝ(1966)

4.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 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 오장완,゛詠懷ゝ(1939)

5.

우러러 받들 수 없는 하늘

검은 하늘이 쏟아져 내린다

왼몸을 굽이치는

병든 흐름도 캄캄히 저물어 가는데

예서 아는 이를 만나면 숨어버리지

숨어서 휘정휘정 뒷길을 걸을라치면

지난간 모든 날이 따라오리라

– 이용악, ゛귓길로 가자ゝ(1947)

6.

내 손바닥에

점찍힌 하나의 슬픔이 있을 때

벌판을 적시는 강물처럼

폭넓은 슬픔으로 오히려

다사로운 그대

– 이형기, ゛그대ゝ(1952)

7.

눈발 부우연 하늘

어느 곳에서 조국은

나의 가는 길을 바라보고 섰느냐

종일토록 울어 끊지 않는

바람 속 어느 곳에서 어머니는

나의 마지막 숨결소리를

들으려는 것이냐

– 임화,゛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 위에ゝ(1950)

8.

부딪혀라 술잔이여, 한때는 우리들도

은빛 살로 나르던 새가 쏘지 않았던가

– 이수익,゛주점에서ゝ(1969)

9.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에 취해 물방울들은

戀愛와 無謀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에

어리석음과 시간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에

걸려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 정현종,゛무지개 나라의 물방울ゝ(1969)

10.

어찌하여 이곳에

청춘은

견디기만 위하여 있고

팔목이 그리워 내 팔목이

고향같이 그리워 찾아오는 포리(捕吏)가 있어

새우잠을 이리저리

뜬 눈으로 밤을 새워야만 하며

어찌하여 손톱까지도 무기로 써야 하며

청춘은

아 어찌하여 이렇게도

몰라보게 되었느냐

– 설정식, ゛붉은 아가웨 열매를ゝ(1948)

11.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 김춘수, ゛처용단장ゝ(1969)

인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p.166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좀 초조해야 하지 않는가.

필사적으로 자아에 매달리고 필사적으로 인생에 매달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p.172

12.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릿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닥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흔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山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유리창1ゝ(1930)

약간만 더 위기에 처하면 파괴되는 모든 사랑처럼 우리가 가졌던 p.186

13.

숨막힐 마음 속에 어디 강물이 흐르뇨

달은 강을 따르고 나는 차디찬 강 마음에 드리노라

수만호 빛이래야 할 내 고향이언만

호랑나비도 오지 않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

– 이육사,゛子夜曲ゝ(1941)

나는 나의 모든 지식과 의지를 걸고 인생의 무의미와 맞서는 그런 이어야 한다. p. 195

어차피 예술과 인생의 두 가지 행복을 동시에 누릴 수 없다면 인생을 포기함이 온당하지 않은가. p.200

한심할 정도로 작고 시시한 인간의 삶은 파멸을 통해서 인간의 이념을 들어내는 것이다. 그의 파멸에는 삶의 우연하고 비본질적인 형태들을 휘몰아가는 어떤 힘, 인생의 이념, 운명의 표정이 각인되어 있다. p.204

14.

아 – 스스로히 푸르른 情熱에 넘쳐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의 깊이우에

네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 –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애비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 서정주,゛바다ゝ(1938)

나는 어설픈 민주주의자보다 도덕적인 파시스트가 p.211

내 소설 속에는 자아를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로, 실재가 아닌 환상임을 환기시켜야 했지. 인생과 세상에 관해 발언하는 저 무수한 확신과 결단의 목소리 앞에 그 확신의 기초인 는 경험과 인식을 밑받침하는 절대적인 지적 기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지. p.216

15.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 정한모,゛나비의 여행ゝ(1967)

16.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눌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어

내 어디로 가라는 슬픈 신호냐

차단-한 등불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 김광균,゛와사등ゝ(1939)

17.

푸른바다……어즈리는 배……

보드라운 그리운 어떤 목숨의

조고마한 푸릇한 그무러진 靈

어우러져 빗기는 살의 아우성

– 김소월,゛여자의 냄새ゝ(1925)

18.

무엇인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은

저기 저 길을 몰고 오는 바람 속에서

호올로 나부끼는 옷자락은

무엇인가 나에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나를 오오래 어두운 그림자로 길가에 세워두는 것은

그리고 무엇인가 단 한 마디의 말로

나를 영원히 여기에서 떨게 하는 것은

– 오규원,゛巡禮의 書ゝ(1973)

우리는 이 실재성에, 이 에 대래 승리하기 위해, 살아나가기 위해 환상을 가져야 한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생존의 무시무시한 본질이 아닌가. p.275

의 존재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겐 여분의 것이고 따라서 우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제까지나 외로움을 견디며 죽어라 노력한다면 나는 진리와 필연을, 나의 작품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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